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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politic

의외의 일본 잔재 문화

by 덩대 2019.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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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일본의 잔재 문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말, 문화, 행동.... 전부 포함되며 이러한 일본 잔재 문화를 없애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부분이 있는것도 사실이죠~

그래서 오늘은 각성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잔재 문화에 대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최근 일본의 경제 보고 조치로 반일 감정 정세가 거세지고 있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 제품에 대한 불매운동도 일어나는 중이다.

그런데 우리 문화 속에는 과거 강점기 시정 일본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생활 깊숙이 박혀있는 일제 잔재 문화를 찾아봤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던 일본군의 의지를 다지며 외친 구호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응원이나 격려의 뜻을 ㅗ널리 쓰이지만 영어권에서는 결코 이런 뜻으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과거 일본은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많다는 독일의 혈액형 이론을 적극 연구했다.

조선인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며 식민 재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현재도 혈액형으로 성격을 구분 짓는 건 우리나라와 일본뿐.

 

 

삼베 수의, 상주의 팔 완장, 검은 리본, 국화 등 우리 장례문화의 많은 부분은 이리제 강점기에 만들어졌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의례 준칙에 따라 바뀐 것.

따라서 100년 전의 장례풍습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일본은 1910년부터 조선과 만주를 오가는 13박 14일의 수학여행을 만들었다.

주 목적은 학생들의 집체교육.

또 조선의 학생들을 일본에 보내 모국을 자학하고 열도를 숭상하게 만들기도 했다.

 

 

메이지 시기 일본은 주민을 학교로 모아 국가의 존재감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학예회나 운동회는 이를 위한 수단 중 하나.

민중의 사고를 마을 중심에서 국가 중심으로 옮기는 데 큰 역활을 했다.

 

 

서울 지면의 3분의 1은 아직도 일본식 지명을 따른다.

인사동, 옥인동, 관수동 등은 일제가 '창지개명'했던 지명.

인천의 송도 역시 일본의 3대 명승지인 마쓰시마의 일본식 한자표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일본이 우리 토지를 불법적으로 강탈하고 조선인들의 결제활동을 통제하기 위해 강제 도입한 제도다.

전 세계적으로 인감증명을 사용하는 국가는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3개국뿐이다.

본래 한국 도깨비는 불이나 송곳니가 없다.

메밀묵과 씨름을 좋아하고 인간과 친숙하다.

혹부리 영감 속 도깨비는 강점기 시절 일본이 우리 문화를 말살하고자 자국의 요괴 이미지를 가져와 교과서에 실은 것

 

 

 

 

이처럼 우리 문화에는 깊숙이 일본 잔재 문화가 참 많네요...

고치지 못하는 부분이 현실적으로 많아서 참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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